서명 이후
1화

서로 자유롭게

2026-06-11

등장인물: 우현

밤 열한 시의 전략기획실은 그가 켜둔 스탠드 하나만 살아 있다. 모니터엔 내일 이사회에 올릴 자료가 띄워져 있어야 하는데, 그의 손에 쥐인 건 휴대폰이다.

화면 속에서 네가 웃고 있다. 회사 워크숍 단체사진. 옆자리 동료의 농담에 고개를 젖히며 터뜨린, 그 무방비한 웃음.

그는 그 사진을 오래 본다. 손가락으로 확대하지도, 넘기지도 않는다. 그냥 본다.

엄지가 한 번, 화면 가장자리를 무의미하게 쓸었다. 그러곤 멈췄다.

그가 휴대폰을 책상에 엎어두고 모니터로 시선을 옮긴다. 자료 창 뒤에 최소화해둔 파일 하나를 끌어올린다. 계약서. 두 사람이 반년 전 변호사 입회 하에 서명한, 조항 열일곱 개짜리 문서.

커서가 천천히 내려간다. 제3조를 지나, 제5조에서 멈춘다.

『양측은 계약 기간 중 사생활에 있어 서로 자유롭게 행동하며, 상대의 교우 관계에 관여하지 아니한다.』

이 줄은 그가 직접 넣자고 한 조항이었다. 서로 부담 없게. 깔끔하게. 그땐 그게 가장 합리적인 설계였다.

그런데 지금 그 한 줄이 거슬린다. 커서가 '자유롭게'라는 단어 위에서 깜빡인다. 깜빡, 깜빡. 그가 지우지도 못하고, 닫지도 못한 채 그 단어를 노려본다.

왜 하필 이 줄일까. 다른 열여섯 개 조항은 멀쩡한데. 그는 답을 알 것 같아서 더 보지 않으려고 모니터를 끈다. 검은 화면에 제 얼굴이 비친다. 그 얼굴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그가 의자를 돌려 창밖을 본다.

사흘 뒤, 그룹 창립기념 리셉션.

샹들리에 불빛이 와인잔마다 잘게 부서지고, 너는 그 한가운데 있다. 계약상 그의 파트너로 동석한 자리지만, 이런 데서 너는 늘 너답게 군다. 처음 본 계열사 임원에게도 스스럼없이 말을 붙이고, 누군가의 시답잖은 농담에 진심으로 웃어준다.

너는 안다. 방 건너편에서 그가 너를 보고 있다는 걸.

직접 확인한 건 아니다. 그냥 느껴진다. 등 뒤 어딘가, 일정한 무게의 시선. 돌아보면 그는 늘 다른 사람과 이야기 중이고, 입가엔 후계자다운 적당한 미소가 걸려 있다. 사람들은 그 미소에 안심하며 다가간다. 다정하고, 여유롭고, 빈틈없는 K그룹의 다음 사람.

그런데 너는 요즘 그 미소 아래가 자꾸 신경 쓰인다. 정확히는, 그 아래를 들춰보고 싶다. 사람들이 안심하는 그 표정이 너한테만은 한 번쯤 무너지는 걸 보고 싶다는 — 너답지 않게 욕심 사나운 생각.

옆에 선 동료가 무슨 말끝에 네 어깨를 툭 치며 같이 웃었다. 별것 아닌, 회식 자리에서 백 번도 더 있는 그런 접촉.

그 순간 방 건너편에서 작은 소리가 났다. 유리가 대리석에 닿는, 또각, 하는 짧은 소리.

너도 모르게 그쪽을 봤다. 그가 막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은 참이었다. 아직 반 넘게 남은 잔을. 그의 손가락은 잔 받침에서 천천히 떨어지는 중이고, 얼굴은 여전히 앞사람을 향해 미소 짓고 있다.

그런데 눈이 다르다.

웃는 입과 따로 노는 눈. 너를 향해 정확히 꽂힌 그 시선엔 미소가 없다. 무섭다기보다 — 조용하다. 너무 조용해서 오히려 무게가 실린, 그런 눈빛. 1초, 어쩌면 2초. 그가 시선을 거두고 앞사람에게 무어라 답하며 다시 완벽한 후계자로 돌아간다.

방금 그건 뭐였지.

너는 동료의 말에 적당히 맞장구치면서도 머릿속 절반이 그쪽에 가 있다. 잔을 내려놓던 그 손. 끝까지 웃고 있던 입과 웃지 않던 눈 사이의, 그 좁고 선명한 틈. 그리고 인정하기 싫지만, 그 틈을 본 순간 네 안에서 먼저 반응한 건 경계심이 아니었다. 아주 작게, 잘했다 싶은 마음이 들었다. 내가 너를 흔들었구나, 하는.

리셉션이 파할 무렵, 직원이 다가와 낮게 전했다. 실장님이 잠깐 뵙자고 하신다고.

복도 끝 작은 응접실. 들어서니 그가 창가에 서 있다. 재킷은 벗어 소파에 걸쳐뒀고, 셔츠 소매를 두 번 접어 올린 차림이다. 행사 내내 빈틈없던 사람치고는 묘하게 풀어진 모습.

테이블 위에 종이컵 두 개가 놓여 있다. 그가 그중 하나를 네 쪽으로 밀었다.

"마셔. 행사장 와인은 영 별로였을 텐데."

받아 든 컵을 무심코 한 모금 마시고, 너는 멈칫했다.

연하게 내린 커피. 시럽은 딱 반 펌프. 너무 달지도, 밍밍하지도 않은. 네가 카페에서 늘 주문하면서도 점원이 갸웃거리게 만드는 그 애매한 비율.

그걸 그가 어떻게 알지.

계약서 어디에도 네 커피 취향 같은 건 없다. 같이 카페에 간 적도 손에 꼽고, 그때 네가 뭘 시켰는지 일일이 말한 기억도 없다.

너는 컵을 내려다보다 그를 봤다.

"이거… 어떻게 알았어요?"

그가 창밖으로 시선을 둔 채 어깨를 살짝 으쓱한다.

"비서가 알아본 거겠지."

거짓말. 그건 너도 안다. 비서가 챙겼다면 종이컵이 아니라 매장 로고 박힌 잔이었을 거고, 무엇보다 그는 지금 너와 눈을 안 맞추고 있다. 여유 넘치던 사람이 갑자기 창밖이 그렇게 흥미로울 리 없다.

그가 한 박자 늦게 덧붙였다.

"전에… 네가 점원한테 시럽 반만 넣어달라고 하는 거 들은 적 있어. 두 번. 같은 말 하더라고."

말해놓고 그는 곧바로 후회하는 얼굴이다. 너무 많이 말했다는 듯, 입을 다물고 컵을 들어 제 커피를 마신다. 그 동작이 미세하게 급하다.

두 번. 그는 두 번을 세고 있었다. 흘려들었을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별거 아냐."

너가 뭐라 묻기도 전에 그가 먼저 선을 그었다. 다시 완벽한 표정. 방금 잠깐 벗겨졌던 무언가가 순식간에 제자리로 돌아간다.

그 빠른 회수가 오히려 너를 멈칫하게 한다. 별거 아닌 걸 이렇게까지 급히 덮는 사람은 없으니까. 너는 한마디 더 하고 싶었다. 별거 아니면 왜 두 번이나 세고 있었냐고. 입안에서 그 말을 굴리다, 삼켰다. 지금 그걸 끄집어내면 이 사람은 정말로 문을 닫아버릴 것 같아서.

"가자. 데려다줄게."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동안 둘 다 말이 없었다.

차 앞에 도착했을 때, 좁다. 기둥과 차 사이, 그가 조수석 문을 열어주려 다가서면서 거리가 한 뼘으로 줄었다. 네 어깨 너머로 그의 향이 닿는다. 행사장에서 맡던 것보다 옅은, 하루 끝의 체취가 섞인 냄새.

그가 손잡이를 잡으려다, 잡지 않았다.

"……계약서엔."

낮은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떨어진다. 너는 고개를 들었다.

"그런 조항 없었는데."

그의 눈이 너를 내려다보고 있다. 아까 방 건너편에서 봤던 그 조용한 눈. 이번엔 1초가 아니라, 한참이다.

"왜 자꾸 다른 사람한테 웃어."

공기가 멎었다. 질문 같지 않은 질문. 따지는 것도 아니고, 화난 것도 아니다. 그냥 — 정말로 모르겠다는, 그래서 본인도 곤란하다는 목소리.

너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아니, 할 말은 있었다. 나도 봤다고, 잔을 내려놓던 그 손을 방 건너편에서 똑똑히 봤다고, 그게 무슨 뜻인지 사흘째 헤아리고 있었다고. 다른 사람한테 웃는 게 쉬운 건 그게 아무것도 아니어서고, 너한테 못 그러는 건 너는 아무것도 아니지가 않아서라고. 그런데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입을 떼는 순간 도로 못 담을 무언가가 시작될 것 같아서. 그의 시선이 네 입가로, 다시 눈으로 천천히 옮겨온다. 한 뼘이던 거리가 반 뼘이 될 것 같은, 그런 기울기.

그러다 그가 먼저 멈췄다.

스스로 한 발 물러서며, 그가 시선을 떨군다. 입술이 한 번 달싹였지만 이번엔 아무 말도 새어 나오지 않았다. 말을 삼킨 그 손이 대신 손잡이를 당겨 문을 열었다. 그 동작 하나로 방금 반 뼘까지 기울었던 모든 게 도로 접힌다. 다정한 후계자의 가면이 소리도 없이 제자리를 찾는다.

"타. 늦었어."

집에 돌아와 현관에 선 채로, 너는 한참을 움직이지 못했다.

말을 삼키고 문을 열어버리던 그 손이 자꾸 되감긴다. 잔을 내려놓던 또각 소리, 두 번을 세던 사람, 반 뼘 앞에서 멈춘 숨.

계약 상대니까 그런 거겠지. 파트너가 행사에서 가벼워 보이면 그쪽도 곤란하니까, 관리 차원에서 신경 쓰는 거겠지. 그래, 그게 합리적이야.

스스로를 설득하다가, 너는 그만뒀다. 그 눈빛은 관리 같은 게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 더 정직해지자면, 네가 그만두고 싶은 건 설득 쪽이 아니었다. 동료가 어깨를 쳤을 때 네 신경이 통째로 방 건너편으로 쏠렸던 것. 잔 내려놓는 소리에 제일 먼저 고개를 돌린 게 너였다는 것. 그가 너를 보고 있었다는 걸 알아챈 순간, 곤란한 게 아니라 — 마음에 들었다는 것. 너를 흔드는 사람을, 너도 흔들고 싶었다는 것. 그 문장을 너는 아직 소리 내어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인정해버리면 이 게임의 규칙이 바뀐다.

휴대폰이 울렸다. 그였다. 한 줄.

『커피, 비서 아니야. 잘 자.』

그 밑에 한 줄이 더 떴다가, 1분 만에 지워졌다. '읽음'만 남기고. 무슨 말을 썼다가 거뒀는지 — 너는 그 빈자리를 오래 들여다봤다. 그리고 너도, 답장 칸에 한 문장을 썼다가 지웠다. 별거 아니면 왜 두 번이나 세고 있었어요, 라고.

오늘 밤은 둘 다, 삼킨 문장 하나씩을 안고 잠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