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커피잔에 스민 미소
第 3 話

99잔에서 한 잔을 뺀 마음

2026-06-09

登場人物: 도혁

어젯밤 그 문틈을, 끝까지 못 본 척하기로 정하고 왔다.

집에서부터 표정까지 연습했다. 평소처럼 고개 한 번 까딱, 창가 자리로, 가방 내려놓고, 핸드폰 켜고—그러면 된다고. 아무 일도 없었다고. 그런데 자리에 엉덩이가 닿기도 전에 그가 행주로 카운터를 닦는 척하며 입을 열었다.

"그거 봤죠?"

행주가 멈췄다. 그가 너를 보지 않은 채, 닦던 자리를 또 닦으며 덧붙였다.

"아니—봤지요?"

말끝을 슬쩍 고쳐 묻는 그 버릇. 평소엔 손님이 받아치기 좋으라고 일부러 빈틈을 만들어 던지던 말투인데, 지금은 그 빈틈으로 그가 한 발 더 들어와 있었다. 봤죠, 가 아니라, 봤지요, 로. 한 음절 늘어난 만큼 거리가 줄어든 것처럼.

너는 가방끈을 쥔 채로 멈췄다. 연습한 무표정이 어디로 갔는지 찾을 새도 없이.

"뭘요."

"뭘요라니."

그가 그제야 행주를 내려놓고 고개를 들었다. 입꼬리는 평소처럼 올라가 있는데, 눈은 평소와 달랐다. 웃음이 눈까지 닿지 않고 그 아래 어딘가에서 멈춰, 너를 살피고 있었다.

"어젯밤에, 우리 가게 문, 안 잠겨 있었거든요."

심장이 한 박자 어긋났다. 그러나 너는 가방을 의자에 내려놓는 동작을 일부러 천천히 끝까지 했다. 들킨 사람이 제일 먼저 하는 게 손을 멈추는 거라는 걸, 너도 알고 그도 안다.

"그래서요. 가게 문 단속은 사장님 일이지 제 일이 아닌데."

"오, 말 잘하네."

그가 짧게 웃었다. 이번엔 진짜 웃음이었는데, 그래서 더 곤란했다. 진짜 웃을 때 그는 한쪽 보조개만 들어갔다. 그걸 알아챈 게 언제부터였는지 너는 떠올리려다 멈췄다.

"근데요."

그가 카운터에 두 팔을 얹고 상체를 살짝 기울였다. 행주를 다시 집어 손가락 사이로 접었다 폈다, 접었다 폈다. 그 손이 가만있질 못했다.

"어제 제가 좀… 혼잣말을 했거든요. 빈 가게에서. 정신 나간 사람처럼."

"…"

"근데 그 혼잣말을 들은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한테 제가 좀 빚진 기분이 들 거 같아서. 미리 물어보는 거예요. 들었어요?"

너는 대답 대신 메뉴판을 봤다. 외우다시피 한 메뉴판을. 거기 적힌 글씨가 하나도 안 읽혔다.

들었다. 다 들었다. 빈 의자—네 의자에 대고 농담을 연습하던 것도, '왜 한 번도 안 웃어요' 하고 처음으로 가면 없이 물었던 것도, 할머니 얘기를 꺼내며 목소리가 잠깐 낮아지던 것도. 컵을 건네던 그 손끝이 종이 한 장만큼 가까워졌다가 '뜨거워요' 하고 도망치던 것도.

그리고 골목에서 본 컵 옆면의 삐뚤빼뚤한 글씨. *안 웃어도 됨. 근데 내일도 와요. 99잔 남음.*

그 99잔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너는 그 한 잔을 채우러 지금 여기 와 있다.

"제가 뭘 들었으면요."

너는 메뉴판을 내려놓고 그를 봤다. 이건 너의 작은 반격이었다. 모른 척도 아니고 인정도 아닌, 그가 자주 쓰던 그 빈틈 만들기.

"제가 뭘 들었는지 사장님이 어떻게 알아요. 사장님이 뭘 말했는지를 알아야 제가 들었는지 안 들었는지가 나오죠."

그의 손에서 행주가 멈췄다.

너는 처음으로, 농담을 던지는 쪽이 아니라 받는 쪽인 그를 봤다. 말문이 막힌 그를. 그건 생각보다 훨씬, 보기 좋았다.

"…야, 이거 봐라."

그가 손바닥으로 제 얼굴을 한 번 쓸어내렸다. 웃음을 참는 건지 숨기는 건지 모를 손짓으로.

"한 번도 안 웃던 사람이, 사람 말려 죽이는 법은 아네."

"안 웃는 거랑 못 받아치는 건 다르니까요."

"그러네요. 다르네."

그가 인정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잠깐, 둘 다 입을 다물었다. 서로가 무얼 아는지 정확히 모른 채로, 그래서 더 함부로 다음 말을 못 꺼내는 침묵이 카운터 위에 얹혔다. 시치미와 진심 사이, 어느 쪽으로도 발을 다 못 내딛고 줄 위에 선 두 사람처럼.

먼저 줄에서 내려온 건 그였다.

"커피 시킬 거죠?"

"네."

"뭐 마실지 말하지 마요."

"…네?"

"맞히는 게 더 멋있잖아요."

그가 등을 돌려 머신 앞에 섰다.

너는 그 등을 봤다. 행주를 어깨에 걸치는 버릇, 원두를 갈기 전에 손목을 한 번 터는 버릇, 포터필터를 끼우고 한 박자 멈췄다가 버튼을 누르는 그 박자까지—언제 이렇게 외웠나 싶은 것들이 줄지어 떠올랐다. 그리고 곧, 너는 더 곤란한 사실 하나를 마주했다.

그도 너를 외웠다는 것.

샷이 내려가는 동안 그는 우유를 데우지 않았다. 너는 따뜻한 라떼를 시키는 사람이 아니니까. 얼음을 정확히—많지도 적지도 않게, 네가 늘 먹던 만큼 컵에 채웠다. 시럽 펌프엔 손도 대지 않았다. 설탕 없이. 어제 네가 시킨 그대로. 온도까지.

그가 컵을 들고 돌아와, 묻지도 않고 네 앞에 내려놨다. 소리도 거의 없이. 컵 바닥이 테이블에 닿는 그 작은 소리마저 조심스러웠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연하게, 얼음 적당히, 설탕 없이."

그가 컵을 너 쪽으로 한 번 더 밀었다. 손끝으로, 톡.

"맞죠."

맞았다. 하나도 안 틀리고 맞았다. 너는 그게 왜 이렇게 마음에 걸리는지 몰라서 컵만 봤다. 표면에 맺힌 물방울이 천천히 흘러내렸다.

"단골이니까."

너는 말했다. 컵에서 눈을 안 떼고.

"단골 취향 외우는 거야 사장님 일이죠."

"그렇죠."

그가 너무 쉽게 동의해서, 너는 오히려 고개를 들었다.

그는 카운터에 기대 서서 너를 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 문이 열리고, 정장 차림의 남자 손님 둘이 들어왔다. 그가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서 오세요! 오늘 날이 좋아서 그런가, 잘생긴 손님만 들어오네."

손님 하나가 픽 웃었다. 그가 메뉴를 받으며 또 한마디 던졌다.

"이거 두 분 형제예요? 아닌데 왜 똑같이 생겼지. 아, 죄송, 두 분 다 잘생겼다는 뜻이에요."

손님들이 소리 내 웃었다. 그가 주문을 받고, 농담을 한 줌 더 뿌리고, 웃음을 한 줌 거둬갔다. 늘 하던 대로. 손님 한 명 한 명을 기분 좋게 만들어 보내는, 5년 차 바리스타의 능숙한 손놀림 같은 농담들.

그리고 너는 그제야 알아챘다.

그가 너한테는, 저걸 안 한다.

저 너스레, 저 끊임없는 농담의 분사를. 그는 너 앞에선 삼켰다. 어제도, 오늘도. '봤죠?'라고 떠본 것 빼고는—그건 농담이라기보다 차라리 질문이었지—그는 네 앞에서 웃기려고 애쓰질 않았다.

웃기려고 너무 애쓰는 게 보여서. 그게 어제 네가 그에게 한 말이었다. 그 한마디 뒤로 그는 너 앞에서만 그 애씀을 내려놓은 것 같았다. 다른 손님들에겐 여전히 한 줌씩 뿌리면서.

너는 그게 무슨 뜻인지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아서, 빨대로 얼음을 한 번 휘저었다.

손님들이 자리를 잡고 앉자, 그가 다시 카운터 안쪽 네 가까이로 돌아왔다. 행주를 또 접으면서.

"왜요. 뭘 그렇게 봐요."

"사장님은."

너는 빨대를 놓았다.

"저한텐 왜 안 웃겨요."

그의 손이 멈췄다. 행주 접던 손이.

"…뭐라고요."

"방금 저 손님들한텐 잘생겼네 형제네 막 던지면서. 저한텐 안 그러잖아요. 어제부터. 아니, 그 전부터."

말해놓고 너는 조금 놀랐다. 이걸 입 밖으로 낼 생각은 없었는데. 그런데 한번 나온 말은 주워 담아지지 않았고, 너는 이왕 이렇게 된 거 그의 눈을 피하지 않기로 했다.

그가 잠깐, 정말 잠깐, 대답을 못 찾는 얼굴을 했다. 그러다 익숙한 곳으로 손을 뻗듯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손님이 안 웃으니까 그렇죠. 밑지는 장사 누가 해요."

"그건 핑계 같은데요."

"오, 핑계."

"네. 핑계."

너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도 알았을 거다. 이 줄다리기에서 평소처럼 농담으로 한 발 빼면, 그건 진 거라는 걸.

그가 행주를 카운터에 툭 내려놨다. 그리고 너 쪽으로 상체를 조금 기울였다. 목소리가 한 톤 낮아졌다.

"…웃기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어요. 가끔."

"왜요."

"웃기면, 그걸로 끝나니까."

너는 그 말을 곧장 이해하지 못했다. 그가 빨대 꽂힌 네 컵을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렸다. 시선은 컵에, 말은 너에게.

"웃겨놓으면 사람들이 좋아하고, 기분 좋게 가고, 그럼 끝이에요. 깔끔하게. 그게 편하고. 근데."

그가 말을 끊었다. 그 끊긴 자리에 무언가가 고여 있었다.

"근데 어떤 사람은, 웃겨서 깔끔하게 보내고 싶지가 않은 거예요. 그게 문제죠."

문제죠, 하고 그는 또 끝에 가서 웃음 한 조각을 붙였다. 하지만 이번엔 그 웃음이 잘 안 붙었다. 종이가 물에 젖어 잘 안 붙는 것처럼.

너는 컵을 두 손으로 감쌌다. 찬 기운이 손바닥으로 올라왔다. 그런데 이상하게 얼굴은 뜨거웠다.

그가 너스레로 자리를 메우지 않으니, 침묵이 그대로 둘 사이에 남았다. 너는 그 침묵이 어색하지 않은 게 어색했다. 한 번도 안 웃던 너와, 늘 웃기던 그가, 둘 다 안 웃고 마주 보고 있는데 그게 불편하지 않았다.

빨대를 입에 물고 한 모금 마셨다. 연하게, 설탕 없이, 딱 네가 좋아하는 만큼. 혀끝에 쓴맛이 얇게 퍼졌다.

*그냥 외운 거야.* 너는 속으로 정리했다. *5년 차 바리스타가 단골 취향 하나 못 외우겠어. 별거 아니야.*

그런데 별거 아닌 거였으면, 그가 우유를 안 데우는 그 짧은 망설임을, 시럽 펌프를 그냥 지나치던 그 손을, 네가 왜 이렇게 또렷이 기억하고 있는 걸까. 머리는 별거 아니라는데, 혀끝에 남은 그 익숙한 쓴맛이 자꾸 별거인 것처럼 굴었다.

점심 손님들이 한 차례 빠져나갔다.

정장 손님들도 가고, 테이크아웃 줄도 끊기고, 카페 안엔 햇빛만 길게 드리웠다. 창으로 든 빛이 카운터 위 원두 봉지에, 그가 닦아둔 잔들에, 천천히 옮겨 앉았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가 가사 없는 부분을 지나갔다.

그가 잔을 닦으며, 닦던 잔 너머로 너를 슬쩍 봤다.

"아까 그거."

"뭐요."

"99잔."

너는 빨대에서 입을 뗐다. 그가 그 얘기를 먼저 꺼낼 줄은 몰랐다.

"…봤네, 진짜."

그가 닦던 잔을 내려놓고 짧게 웃었다. 들켰다는 걸 인정하는 웃음. 어젯밤 컵에 적은 그 글씨를 네가 봤다는 걸, 그는 이제 확실히 알았다.

"그거 무슨 뜻이에요."

너는 물었다. 묻고 싶었던 걸 드디어 물었다.

그가 잔 닦던 행주를 어깨에 걸치고, 카운터에 두 팔을 얹었다. 잠깐 창밖을 봤다가, 다시 너를 봤다. 무슨 얘기를 어디서부터 해야 하나 고르는 사람의 얼굴로.

"우리 할머니가요."

그가 천천히 시작했다.

"커피를 손으로 내렸거든요. 핸드드립. 옛날식으로. 근데 손님이 오면 꼭 그랬어요. '몇 잔째지?' 하고. 자기가 평생 내릴 커피를 무슨 정해진 숫자처럼 셌어요. 백 잔이면 백 잔, 천 잔이면 천 잔, 그렇게 정해져 있고 그걸 하나씩 까나가는 것처럼."

너는 잠자코 들었다. 그가 이렇게 길게, 농담 없이 말하는 걸 본 게 어제가 처음이었는데, 오늘 또 듣고 있었다.

"제가 어렸을 때 물어봤어요. 할머니, 그럼 그 숫자 다 까면 어떻게 돼요? 하고."

그가 거기서 잠깐 웃었다. 그런데 그 웃음이 좀 쓸쓸했다.

"할머니가 그러더라고요. '다 까면, 그때 제일 맛있는 한 잔을 내려주려고 아껴둔 사람한테 주는 거지.'"

"…"

"근데 할머니는 그 마지막 한 잔을, 못 내렸어요."

라디오의 노래가 다음 곡으로 넘어갔다. 그가 어깨의 행주를 만지작거렸다.

"그래서 저는 그게 좀… 무서웠나 봐요. 누구한테 제일 맛있는 한 잔을 아껴두는 거. 끝까지 세는 거. 그러다 못 주면 어떡해. 세다 만 숫자만 남으면 어떡해."

그가 거기서, 익숙한 손짓처럼 농담을 집어 들었다.

"그래서 저는 손님한테 그냥 막 줘요. 아무한테나. 백 잔이고 천 잔이고 안 세고. 세면 정드니까. 정들면—"

그가 말을 끊었다.

"정들면요?"

"정들면 끝이 생겨요. 시작한 셈은 언젠가 끝까지 가야 되고. 그러다 할머니처럼 마지막 한 잔을 못 내리면, 그 한 잔이 어디 안 가고 남거든요. 평생."

그가 거기서 어깨를 으쓱했다. 별것 아니라는 듯이.

"그래서 안 세는 게 편해요. 셈을 안 하면, 틀릴 일도 없고."

그가 그 말을 너무 가볍게, 너무 농담처럼 했다. 마치 날씨 얘기하듯이. 그런데 바로 그 가벼움이, 그 말이 그에게 얼마나 무거운지를 거꾸로 다 드러냈다.

거리 두는 농담이 거기서 한 번 헛돌았다. 늘 매끄럽게 분위기를 미끄러뜨리던 그 농담이, 이번엔 미끄러지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헛바퀴를 돌았다. 그도 그걸 느꼈는지, 말끝에 웃음을 붙이려다 실패하고 입을 다물었다.

너는 그 순간, 어젯밤 빈 의자에 대고 농담을 연습하던 그가 왜 그렇게 외로워 보였는지 알 것 같았다. 그는 모두를 웃기면서, 아무하고도 끝까지 세지 않으려고 애쓰는 사람이었다. 정들기 전에 깔끔하게 보내려고. 못 끝낼 셈을 시작하기 전에.

그런데 컵 옆면에 *99잔 남음*이라고 적었다.

세기 시작한 거다. 너를.

그 사실이 가슴 어딘가를 천천히 눌렀다. 너는 빨대를 만지작거렸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그 대신 손을 움직였다.

"그럼 저는요."

너는 결국 입을 열었다.

"99잔 남았으면. 저는 몇 잔째예요."

그가 너를 봤다. 이번엔 농담을 집어 들지 않았다. 한참을.

"…첫 잔이요."

그가 말했다.

"세기 시작한 첫 사람."

심장이 뛰는 게 느껴졌다. 평소처럼 쿵, 하고 떨어지는 게 아니라, 가슴 안에서 무언가가 천천히 차오르는 것처럼. 그가 끝내 데우지 않은 우유 대신, 그 말이 너를 데웠다.

너는 무슨 얼굴을 해야 할지 몰랐다. 어젯밤 집에 가면서 정하지 못한 그 얼굴을, 지금도 못 정했다. 그래서 그냥 컵을 들었다. 다 마셔서 얼음만 남은 컵을. 빈 컵을 드는 건 마실 게 없어도 손을 어디 둘 데가 필요할 때 하는 짓이라는 걸, 너도 알고 그도 알았겠지만.

"한 잔 더 줄까요?"

그가 물었다. 너의 빈 컵을 보고.

"…네."

너는 컵을 카운터 안쪽으로 내밀었다. 그가 받으려고 손을 뻗었다.

카운터 안쪽은 좁았다. 머신과 싱크와 원두 통이 빼곡한 그 한 뼘 공간. 너는 컵을 든 손을 카운터 너머로 넘겼고, 그는 그 컵을 받으려고 몸을 기울였다.

손끝이 닿을 뻔했다. 어제처럼.

그런데 이번엔 그가 '뜨거워요' 하고 빼지 않았다. 컵을 받아 든 그의 손이, 컵을 내려놓는 대신, 너의 손목 안쪽에—그 얇고 흰 안쪽 피부에—잠깐 머물렀다.

손가락 두 개가, 네 손목 안쪽 맥이 뛰는 자리에.

세상이 잠깐 조용해졌다. 라디오 소리도, 머신의 잔열이 식는 소리도, 다 멀어졌다. 너는 숨을 쉬는 법을 잠깐 잊었다. 그의 손끝이 닿은 자리에서, 너의 맥박이 그에게 들킬 만큼 크게 뛰었다. 그도 그걸 느꼈을 거다. 손가락 끝으로, 네가 입으로는 절대 말 안 할 걸 다 읽었을 거다.

그가 고개를 들었다. 너와 눈이 마주쳤다. 이번엔 그의 눈에 웃음이 없었다. 농담도, 가면도 없었다. 그냥, 너를 보고 있었다. 너의 상태를—맥박이 뛰는 걸, 숨이 멎은 걸, 손을 빼지 않는 걸—전부 알아채면서, 그 자리에 머물렀다.

손목 안쪽이 데일 듯 뜨거웠다. 그의 손은 차가운데, 닿은 자리만 뜨거웠다.

그가 입술을 살짝 뗐다. 무슨 말을 하려고.

그 순간 출입문의 종이 울렸다.

딸랑.

"어서 오세… 요."

그가 반사적으로 인사를 하다 끝을 흐리며, 손을 거뒀다. 너의 손목에서, 천천히도 아니고 급하게도 아니고, 막 잠에서 깬 사람처럼. 새 손님이—아주머니 한 분이—문 앞에서 메뉴판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가 한 발 물러났다. 그리고 익숙한 곳으로 돌아가듯,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손님, 오늘 라떼가 그렇게 맛있어요. 제가 만들어서 그런가."

아주머니가 웃었다. 그는 다시 그 능숙한 바리스타로 돌아가 있었다. 농담 뒤로, 깔끔하게.

너는 카운터에서 한 발 물러나 창가 자리로 돌아왔다. 손목 안쪽이 식지 않았다.

*그냥 컵 받다가 손이 스친 거야.* 너는 다시 정리하려고 했다. *좁은 데라서. 어쩌다.*

그런데 어쩌다 스친 거였으면, 왜 그가 빼지 않고 머물렀을까. 왜 손가락 두 개가 하필 맥이 뛰는 자리에 정확히 놓였을까. 왜 너는 그 손을 안 뺐을까.

머리가 어쩌다, 라고 말하는 동안, 손목의 맥박이 먼저 답하고 있었다. 아직도 뛰고 있었다. 그가 닿았던 그 자리에서, 그 박자로. 머리보다 몸이 먼저 알았다. 이건 어쩌다가 아니라는 걸.

너는 손목을 다른 손으로 슬쩍 감쌌다. 식히려고. 그런데 네 손이 닿으니 그 자리가 더 또렷해졌다. 마치 그 두 손가락이 거기 자리를 표시해두고 간 것처럼.

오후가 천천히 흘렀다.

손님이 들고 났다. 그는 그들을 웃기고, 너는 창가에서 식지 않는 손목을 들고 앉아 있었다. 가끔 그가 너를 봤다. 너도 가끔 그를 봤다. 눈이 마주치면 둘 다 무언가 못 본 척, 그러나 다 본 사람들처럼 시선을 돌렸다.

해가 기울었다. 창으로 든 빛이 주황으로 익었다가, 묽어졌다가, 카운터에서 내려갔다. 마감 시간이 가까워졌다.

마지막 손님이 나가고, 그가 의자를 하나씩 테이블에 올리기 시작했다. 너는 가방을 챙겼다. 일어서야 하는데, 발이 잘 안 떨어졌다.

그가 카운터 뒤에서 무언가를 했다. 컵 하나를 집어 들고, 펜을 들고. 어젯밤처럼.

그가 컵을 들고 너에게 다가왔다. 빈 종이컵에, 삐뚤빼뚤한 글씨가 적혀 있었다. 어제 그 글씨체로.

너는 컵을 받아 옆면을 읽었다.

*98잔 남음.*

그 아래, 한 줄이 더 있었다.

*근데 오늘은… 한 잔 더 마시고 갈래요?*

너는 그 글씨를 한 번 읽고, 두 번 읽었다.

한 잔 더 마시고 갈래요. 그건 농담의 형식이었다. 컵에 적은 장난스러운 글씨, 물음표 하나. 늘 하던 그 거리 두기의 모양. 그런데 그 안에 담긴 건 처음으로 에두르지 않은 말이었다. 마감한 카페에서, 손님도 없는데, 한 잔 더. 그건 커피 얘기가 아니었다.

같이 있고 싶다는 말이었다. 농담을 빌려서, 그러나 농담 뒤로 숨지 않고.

너는 고개를 들었다. 그가 너를 보고 있었다. 입꼬리는 올라가 있는데, 손은—펜을 쥔 손은—가만있질 못하고 펜 끝을 돌리고 있었다. 긴장한 거다. 늘 웃기던 사람이, 너 앞에서.

가겠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런데 입이 안 떨어졌다. 아니라고도 못 했다. 그 두 마디 사이에서, 너는 또 어떤 얼굴을 해야 할지 못 정한 채로 그를 봤다.

너의 그 멈칫을, 그가 봤다. 그리고—

"아, 대답 지금 안 해도 돼요."

그가 먼저, 웃으며 한 발 물러났다. 펜을 귀에 꽂으면서.

"대답은 내일. 어차피 내일도 올 거잖아요. 98잔 남았으니까."

그가 등을 돌려 다시 의자를 올리러 갔다. 도망치듯, 그러나 도망치는 걸 들키지 않으려고 휘파람까지 불면서.

너는 컵을 손에 쥔 채 서 있었다. *98잔 남음. 한 잔 더 마시고 갈래요?* 그 글씨가 손안에서 자꾸 만져졌다. 보지 않아도 옆면의 삐뚤빼뚤한 획 하나하나가 손바닥에 닿는 것 같았다.

내일, 무슨 얼굴로 와서 무슨 대답을 할지는 아직 모른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해졌다. 시작한 셈은 끝내 못 채운 한 잔을 남긴다고 믿는 그 사람이, 그 남는 한 잔이 무서우면서도 너를 세기 시작했다는 것.

—그가 왜 그렇게 믿게 됐는지, 그 첫 잔을 못 내린 할머니의 마지막엔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아직 컵 옆면 어디에도 적혀 있지 않았다.

너는 컵을 가방에 넣지 못하고 그냥 손에 쥐었다. 종이컵 하나가 이렇게 무거울 수 있나 싶게.

그는 등을 돌린 채 의자를 올리고 있었다. 다리 네 개가 위로 가게, 한 손으로 좌석을 받치고 다른 손으로 등받이를 잡아 뒤집어 테이블에 얹는, 하루에도 몇 번씩 하는 그 동작. 휘파람은 어느새 끊겨 있었다. 끊긴 자리에 라디오의 잔음만 남았다.

너는 그 등을 보면서,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오늘 한 잔 더 마시고 가면, 그건 대답이 된다. 너는 그걸 알았다. 그도 알기 때문에 '대답은 내일'이라고 먼저 빠져준 거였다. 너에게 도망칠 골목 하나를 남겨두려고. 자기가 늘 쓰던 그 골목을, 이번엔 너 쓰라고 내준 것처럼.

"저… 갈게요."

너는 말했다. 생각보다 목소리가 작게 나왔다.

그가 의자를 마저 올려놓고 돌아섰다. 손을 바지에 슥 닦으면서.

"네. 조심히 가요."

평범한 인사였다. 그런데 그 평범한 말을 하면서 그는 너를 정면으로 봤다. 손님을 보낼 때처럼 문 쪽을 보며 던지는 인사가 아니라, 너를 보고, 너에게.

너는 문 쪽으로 한 발 옮겼다. 그리고 멈췄다. 손에 쥔 컵 때문에.

"이거."

너는 컵을 들어 보였다.

"가져가도 돼요?"

물어놓고 너는 좀 후회했다. 빈 종이컵을 가져가도 되냐고 묻는 사람이 어디 있나. 안 가져가는 게 이상한 거지. 그런데 너는 그 컵을 두고 가면 그가 도로 버릴까 봐, 아니면 더 나쁘게는 네가 그걸 두고 갈 만큼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가 생각할까 봐, 물어버렸다.

그가 잠깐 멈칫하더니, 웃었다. 이번엔 보조개가 한쪽만 들어가는, 진짜 웃음.

"그거 제 글씨 들어간 건데. 저작권료 받아야 되나."

"…얼마요."

"한 잔. 내일."

또 한 잔이었다. 그는 자꾸 모든 걸 잔으로 셌다. 숫자로 환산해서, 농담의 형식에 담아서. 그래야 직접 말하지 않아도 되니까. 너는 그게 그의 방식이라는 걸 이제 알았다. 무거운 걸 가벼운 척 건네는 사람. 가벼운 척하다가 들켜버리는 사람.

"알았어요."

너는 컵을 가슴 앞으로 한 번 고쳐 쥐었다.

"내일 갚을게요."

그 말이 입에서 나오고 나서야 너는 그게 무슨 뜻이 됐는지 알았다. 내일 온다는 약속. 한 잔 갚으러. 그가 미뤄둔 대답을 들고. 그가 그걸 눈치챘는지, 한쪽 보조개가 조금 더 깊어졌다. 그러나 그는 그걸 붙잡고 더 밀어붙이지 않았다. 늘 한 발 더 가던 사람이, 오늘은 거기서 멈췄다. 너를 위해 멈추는 법을 막 배운 사람처럼.

"가요. 늦었어요."

그가 손등으로 문 쪽을 가리켰다. 그 손이, 아까 네 손목에 닿았던 그 손이었다.

문을 밀자 종이 울렸다. 딸랑.

들어올 때와 같은 소리인데 다르게 들렸다. 너는 한 발을 밖에 내딛었다. 저녁 공기가 얼굴에 닿았다. 낮 동안 데워진 골목이 식어가는, 미지근하고 묽은 공기.

등 뒤에서 그가 말했다.

"내일은."

너는 돌아봤다.

그가 카운터 안쪽에 서서, 행주를 또 손가락에 감았다 풀었다 하고 있었다. 말을 고르는 그 손버릇.

"내일은 우유 데워줄까요."

"…저 따뜻한 거 안 마시는데요."

"알죠. 아는데."

그가 잠깐 시선을 떨궜다가 들었다.

"가끔은 안 하던 거 해보는 것도, 그렇게 나쁘진 않더라고요. 저도 요즘 안 하던 거 하잖아요."

안 하던 거. 너를 세는 거. 빈 의자에 농담을 연습하는 대신 진짜 사람한테 그 농담을 꺼내는 거. 한 발 가서 멈추는 거. 너는 그 '안 하던 거'의 목록이 전부 너 때문에 생겼다는 걸 알았다.

"생각해볼게요."

너는 말했다. 우유 얘긴지, 대답 얘긴지, 너도 모를 말로.

"그래요. 생각해요. 천천히."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천천히, 라는 말에 힘을 줘서.

골목을 걸었다.

가로등이 하나씩 켜지고 있었다. 너는 컵을 손에 든 채 걸었다. 가방에 넣으면 구겨질까 봐. 빈 종이컵이 구겨질까 봐 손에 들고 걷는 자신이 우스워서, 너는 한 번 웃을 뻔했다. 한 번도 안 웃던 네가.

손목 안쪽은 아직 그대로였다. 가게를 나선 지 한참인데, 저녁 공기가 거기만 비껴가는 것 같았다. 손가락 두 개가 정확히 맥 위에 얹히던 그 무게가, 식기는커녕 걸음마다 한 번씩 도로 눌리는 것 같았다. 너는 걸으면서 그 손목을 다른 손으로 감쌌다. 식히려던 게 아니라, 그 무게가 아직 거기 있는지 확인하려고. 있었다.

*그냥 손이 스친 거야.* 너는 또 정리하려고 했다. *컵 받다가. 좁아서.*

그런데 이번엔 그 정리가 더 빨리 무너졌다. 좁아서 스쳤으면 곧장 뗐어야지. 그는 머물렀다. 맥이 뛰는 자리에. 그리고 너는—너는 손을 안 뺐다. 뺄 수 있었는데. 빼야 한다고 생각도 했는데. 그런데 몸이 말을 안 들었다. 머리가 '빼'라고 하는 동안, 손목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머리보다 몸이 먼저, 빼고 싶지 않다고 정해버렸다.

신호등 앞에서 멈췄다.

빨간불. 차도 없는데 너는 그냥 섰다. 컵을 들어 옆면을 다시 봤다. *98잔 남음. 근데 오늘은… 한 잔 더 마시고 갈래요?* 가로등 불빛에 그 삐뚤빼뚤한 글씨가 노랗게 떴다.

98잔. 첫 잔은 어제였고, 오늘이 둘째 잔이었으니, 그는 정확히 세고 있었다. 너를. 하나씩. 끝까지 세면 못 채운 한 잔이 남는다고 믿으면서도, 그 끝을 향해 한 잔씩 까나가면서.

너는 문득 무서워졌다. 그가 무서워하는 그것이, 너에게도 옮은 것처럼. 98잔을 다 까면, 그땐 뭐가 되는 걸까. 할머니가 끝내 못 내렸다는 그 마지막 한 잔처럼, 세다 만 숫자만 남는 걸까. 아니면.

신호가 바뀌었다. 초록불. 너는 길을 건넜다. 답은 건너편에 없었다.

집에 와서, 너는 그 빈 컵을 책상 위에 올려뒀다.

버리려다, 못 버렸다. 글씨가 적힌 쪽이 보이게 돌려놓고, 한참을 봤다. 씻은 머리에서 물이 떨어지는 동안에도, 불을 끄고 누운 뒤에도, 어둠 속에서 그 컵이 거기 있다는 게 느껴졌다.

천장을 보며 너는 오늘을 되감았다. 자꾸. 처음부터.

'봤지요?' 하고 한 음절을 늘려 묻던 목소리. '웃기면 그걸로 끝나니까'라던 낮아진 톤. '첫 잔이요' 하던, 농담을 집어 들지 않은 그 한참의 침묵. 그리고 손목. 차가운 손가락. 데일 듯 뜨겁던 그 자리. 라디오 소리가 멀어지고 세상이 잠깐 조용해지던 그 한 박자.

너는 그 한 박자에서 자꾸 멈췄다. 그가 입술을 떼던 그 순간에서. 종이 울리지 않았다면, 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을까. 그건 어떤 말이었을까. 너는 그걸 떠올려보려다, 스스로 멈췄다. 떠올리면, 너무 멀리 가버릴 것 같아서.

그런데 한 가지가 자꾸 걸렸다.

'셈을 안 하면, 틀릴 일도 없고.'

그는 그 말을 날씨처럼 가볍게 했다. 어깨를 으쓱하면서. 그런데 셈을 안 하는 게 편하다고 그렇게 쉽게 말하는 사람은, 한 번은 끝까지 세어봤다가 마지막 한 잔을 손에 쥔 채 멈춰선 적이 있는 사람이다. 그 한 잔을 어쨌는지는, 그가 아직 한 글자도 적지 않았지만.

할머니는 마지막 한 잔을 못 내렸다. 누구한테 주려고 아껴둔 그 한 잔을. 그가 그 얘기를 하며 쓸쓸하게 웃을 때, 너는 거기 그가 말하지 않은 게 더 많다는 걸 느꼈다. 할머니의 마지막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못 내린 그 한 잔이 누구의 몫이었는지. 그리고 왜 어린 그가, 그걸 '안 세는 게 편하다'는 말로 평생 덮어두게 됐는지.

그는 너에게 컵의 숫자는 적어줬다. 그런데 그 숫자가 왜 무서운지는, 아직 한 글자도 적지 않았다.

너는 돌아누웠다.

내일, 무슨 얼굴로 갈지는 아직 모른다. 우유를 데워달라고 할지, 따뜻한 건 안 마신다고 또 고집을 부릴지. 한 잔 더 마시고 가겠다고 할지, 아니라고 할지. 그가 미뤄둔 대답을, 너는 아직 손에 쥐고만 있었다. 빈 컵을 쥐듯이.

다만 한 가지는, 어둠 속에서도 또렷했다.

내일 너는 그 가게에 갈 거고, 한 잔을 갚을 거고, 그러면 97잔이 남는다는 것. 그가 세는 그 숫자 안에, 이제 너도 같이 세어지고 있다는 것.

그리고 언젠가 너는 묻게 될 거였다. 컵 옆면이 아니라 그의 얼굴을 보고, 농담을 빌리지 않고. 왜 끝까지 세는 게 그렇게 무서워졌는지. 그 첫 잔을 끝내 못 내린 할머니의 마지막에,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손목 안쪽이, 그가 닿았던 그 자리가, 어둠 속에서 한 번 더 뛰었다. 낮에 그의 손가락 두 개가 거기 얹혔을 때와 똑같은 박자로.

너는 그 박자에 맞춰 눈을 감았다.

내일 갚을 한 잔이 커피가 아니라는 건, 너는 이미 알고 있었다. 다만 그걸 무슨 얼굴로 건넬지를—어젯밤에도, 오늘 온종일도, 끝내 못 정한 그 얼굴을—너는 또 못 정한 채로, 잠 속으로 한 발을 들였다. 정하지 못한 채로도, 갈 거라는 것만은 정해진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