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담인 척
1화

웃음이 채 돌아오기 전

2026-06-07

등장인물: 태훈

웃음이 채 돌아오기 전

늘 웃는 그 남자가, 전화를 끊은 직후 1초 동안 웃지 않고 있었다. 4층 복도 끝, 자판기 옆 그 좁은 빛 속에서. 그 얼굴은 누구의 것이었을까. 그리고 너는 왜, 그걸 못 본 척할 수 없는 걸까.

너는 출력물을 들고 그 복도를 지나는 길이었다. 태훈. 이름을 안 지는 두 달, 목소리를 안 지는 그보다 오래. 사무실 어디에 있어도 들리는 사람이니까. 웃음소리가 먼저 도착하고 사람이 뒤따라오는 식의, 그런 남자. 그래서 더 이상했다. 휴대폰을 귀에서 떼는 그의 손이 평소보다 반 박자 느렸고, 화면을 끄는 엄지에 힘이 들어가 있었고, 무엇보다—

웃음이 없었다.

말끔하게 비어 있는 얼굴이었다. 표정을 짓는 걸 잊은 게 아니라, 표정을 다 거둬들이고 잠깐 어딘가에 가 있는 얼굴. 입꼬리가 어느 위치에도 정착하지 못한 채 멈춰 있었고, 눈은 창밖을 보는데 창밖을 안 보고 있었다. 너는 그 1초를 통째로 봤다. 정확히는, 봐 버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가 너를 알아챘다. 그러자 얼굴이 켜졌다. 정말로 스위치처럼. 입꼬리가 제자리를 찾고, 눈가에 익숙한 주름이 잡히고, "어이, 기술문서팀!" 하는 목소리가 복도를 가득 채웠다. "또 뭐 그렇게 무거운 거 들고 다녀. 그러다 허리 나가."

"괜찮아요." 너는 출력물을 고쳐 안았다.

"안 괜찮아 보이는데." 그가 한쪽 눈썹을 들었다. 1초 전의 그 빈 얼굴은 어디에도 없었다. 너무 없어서, 오히려 그게 더 또렷하게 이상했다. 사람이 저렇게 빨리 표정을 갈아 끼울 수 있나. 마치 방금 전 그 얼굴이 진짜고, 지금 이게 갈아 끼운 거라는 듯이.

너는 별 대답 없이 그를 지나쳤다. 등 뒤로 그가 누군가에게 또 농담을 던지는 소리가 들렸다. 사무실 전체가 그 소리에 가볍게 웃었다. 모두가 듣는 그 웃음. 하지만 1초의 그 얼굴을 본 건 너 하나였다.

그게 시작이었다. 별것 아닌 1초가, 지워지지 않는 1초가 되는 순간.

점심시간 4층 구내식당. 자리 배치라는 게 참 우습다. 두 달 전 누군가가 부서별 테이블을 재배치하면서, 기술문서팀 끝자리와 현장 엔지니어링팀 끝자리가 등을 맞대게 됐다. 그 결과 식판을 들고 앉으면 옆이 늘 태훈이다.

오늘도 그는 식판 옆에 도면을 펼쳐놨다. A3 한 장을 반찬 국물 안 묻게 절묘하게 접어서, 젓가락으로 탈곡 드럼 어쩌고를 가리키며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다. 밥 먹는 자리에 설계 도면을 펼치는 인간이라니. 너는 처음 그 광경을 봤을 때 진심으로 별종이라고 생각했다.

"이거 봐 봐." 그가 도면을 네 쪽으로 슬쩍 밀었다. 묻지도 않았는데. "여기 이 각도가 1도만 틀어져도 곡물이 다 으깨져. 1도야, 1도. 사람 마음 같지 않아?"

"네?"

"각도 1도에 결과가 완전히 달라지는 거." 그가 씩 웃었다. "관심도 그렇잖아. 살짝만 틀어도 다 으깨지고."

"무슨 소리예요, 밥 먹다 말고."

"심오한 얘기 했는데 안 통하네." 그가 과장되게 어깨를 늘어뜨렸다가, 너의 식판 옆에 놓인 종이컵을 턱으로 가리켰다. "그거 또 블랙이지. 설탕 없이."

너는 컵을 들다 멈췄다. "어떻게 알았어요?"

"두 달 봤는데 그걸 모르냐." 그가 다시 도면으로 시선을 돌리며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넌 단 거 들어가면 미간부터 찌푸려. 첫날에 누가 믹스커피 줬을 때 그 표정, 아주 볼만했어."

말해준 적 없다. 너는 네가 설탕을 안 넣는다는 걸 그에게 말한 적이 없다. 그는 그걸 본 거다. 두 달 동안, 시끄럽게 떠드는 척하면서. 너는 컵 가장자리에 입을 대며 그 사실을 천천히 삼켰다.

복도의 1초와 이 가벼움. 그 둘 사이의 낙차가 자꾸 의식됐다. 이렇게까지 시끄럽고 이렇게까지 사람을 잘 보는 남자가, 왜 혼자 있을 땐 표정을 다 거둬들일까. 너는 도면 위 1도짜리 각도를 멍하니 봤다. 살짝만 틀어도 다 으깨진다고, 방금 그가 말했다.

마감 주간이었다. 그날 너는 점심을 굶었다. 매뉴얼 개정본을 두 시쯤 넘기고 나서야 배가 고픈 걸 깨달았고, 깨달았을 땐 이미 식당이 문을 닫은 뒤였다.

자리로 돌아와 보니 책상 위에 과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네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포스트잇도, 메모도 없었다. 그냥 단백질 바 하나. 단 거 안 들어간 거로, 골라서.

누군지 알 것 같아서 너는 고개를 돌렸다. 칸막이 너머, 그가 모니터를 보며 통화 중이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그가 입 모양으로 '먹어'라고 했다.

오후에 너는 그에게 다가갔다. "아까 그거, 고마워요. 잘 먹었어요."

"뭘." 그가 키보드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진짜로요." 너는 한 발 더 들어갔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1초의 얼굴 때문이었는지도. "태훈 씨, 자기는 잘 안 챙겨 먹으면서 남은 잘 챙기더라."

순간 그의 손이 멈췄다. 아주 잠깐. 그러더니 그가 의자를 빙 돌려 너를 보며 더 환하게 웃었다. 너무 환해서, 그게 방패라는 걸 너는 알아챘다.

"야, 무슨 소리야. 나 덕분에 너 오늘 버틴 거잖아. 고마우면 다음에 커피나 사. 블랙 말고 진짜 커피로." 그가 손가락을 까딱였다. "아 맞다, 그 매뉴얼 그림 18페이지에 단위 틀린 거 봤어? 내가 봤는데 mm를 cm로—"

화제가 그렇게 미끄러졌다. 매끄럽게, 능숙하게. 네가 안쪽으로 한 뼘 들어오자, 그는 웃으면서 정확히 그 한 뼘만큼 뒤로 빠졌다. 너무 자연스러워서 무례하지도 않았다. 다만 분명했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웃음소리에 섞여 있었다.

자리로 돌아오는 길에 너는 그 단백질 바 포장지를 만지작거렸다. 챙기는 건 받아주면서, 챙김 받는 건 절대 안 받는 사람. 주는 건 쉬운데 받는 게 무서운 사람이 있다는 걸, 너는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그리고 복도의 1초가 또 머릿속에서 재생됐다. 멈춰. 너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옆자리 사람한테 뭘 이렇게까지. 그런데 다음 순간 또 재생되고 있었다. 입꼬리가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한, 그 완성되지 않은 얼굴이.

야근. 9시가 넘어 사무실엔 너와 몇 명만 남았고, 엘리베이터를 탔을 때 거기엔 그가 있었다. 단둘이었다.

1층까지 다섯 개 층. 그 침묵이 어색하지 않게 채워질 이유는 충분했다—피곤하니까, 늦었으니까, 둘 다 말이 없을 만하니까. 엘리베이터 거울에 비친 그는 평소보다 조용했다. 농담을 고르지 않은 얼굴. 낮에 본 그 환한 방패가 잠깐 내려가 있었고, 그게 복도의 1초와 닮아 있어서 너의 맥박이 먼저 반응했다. 머리가 '물어봐도 되나' 망설이는 사이에, 몸은 이미 알고 있었다. 지금 이 사람, 웃고 있지 않다는 걸.

"태훈 씨." 너는 거울 속 그를 봤다. "아까 낮에… 통화. 괜찮았어요?"

그의 웃음이 0.5초 늦게 켜졌다.

너는 그 0.5초를 들었다. 맥박으로 들었다. 평소의 그라면 0초였을 그 자리에, 반 박자의 공백이 있었다. 그 공백 동안 거울 속 그의 눈이 너를 봤다. 정말로 봤다. 무슨 말을 할까 고르는 게 아니라, 무슨 말을 안 할까 고르는 눈으로.

"통화? 무슨 통화." 그가 마침내 웃었다. "나 하루에 통화 백 통은 해. 다 괜찮아. 내가 안 괜찮은 거 봤어?"

"아니, 그게 아니라—"

"오늘 진짜 고생했다, 너." 그가 너의 말을 부드럽게 덮었다. 손을 뻗어 너의 가방끈을 톡 잡아 어깨에 바로 올려줬다. 흘러내려 있던 끈을. 그 손길이 닿은 어깨가 미지근했다. "이거 또 떨어졌네. 칠칠치 못하게."

띵—. 1층이었다. 문이 열렸다.

"먼저 가." 그가 한 발 비켜서며 웃었다. 완벽한 웃음으로. 0.5초의 공백 같은 건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너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밤공기가 얼굴에 닿았는데도 머릿속엔 그 반 박자가 남아 있었다. 그는 끝내 통화에 대해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백 통'이라는 말로, 가방끈이라는 핑계로, 그걸 통째로 덮어 버렸다.

늘 완벽하게 밝은 사람이, 무엇을 그렇게까지 웃음으로 덮고 있는 걸까. 너는 멀어지는 엘리베이터 불빛을 한 번 돌아봤다. 그 안쪽—웃음이 채 돌아오기 전의 그 1초가 사는 곳을, 너는 알고 싶어졌다. 하필 그를. 왜 하필 그를.

내일도 그는 옆자리에 도면을 펼칠 것이다. 그리고 너는 이제, 그 도면 너머의 얼굴을 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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