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잘 지냈어?
Ep. 3

너만 아는 줄 알았던 손

2026-06-10

Cast: 민석

약속한 시간에 맞춰 갔는데 병원은 불이 꺼져 있다.

그런데 반쯤 내려간 셔터 안에서, 그의 것이 아닌 목소리가 그의 이름을 편하게 부른다.

어제 손에 쥐여주려던 초콜릿이 주머니 속에서 갑자기 무거워진다.

저 사람은 누구이고, 왜 너만 모르나.

너는 셔터 앞에서 멈춰 선다. 어제 이 자리에서 너는 그의 손을 잡으려 했다. '손 줘봐요'라고, 늘 내미는 쪽이었던 그를 처음으로 받는 자리에 앉히려 했다. 그 말이 아직 입천장 어딘가에 미지근하게 남아 있는데.

"민석아, 그거 거기 두면 또 까먹어."

여자의 목소리는 셔터 틈을 타고 너무 쉽게 흘러나온다. 책망도 아니고 부탁도 아닌, 그냥 오래 해온 말. 닳도록 해본 사람만 낼 수 있는 매끄러운 음높이.

너는 한 발 물러섰다가, 그게 부끄러워서 다시 제자리에 선다.

들어가야 하나. 아니, 들어가도 되나. 어제까지만 해도 '내일 이 시간'이라는 약속에는 분명히 너와 그, 두 사람만 들어 있었다. 그 안에 다른 사람의 자리는 그려본 적이 없었다.

셔터 아래로 노란 불빛이 한 뼘쯤 새어 나온다. 진료실 불은 꺼졌는데 안쪽 처치실엔 불을 켜둔 모양이다. 그 불빛 위로 발 그림자 두 개가 겹쳤다 떨어진다.

"천천히 먹어. 누가 뺏어 가."

여자가 웃는다. 그 웃음의 결이 너를 한 번 더 멈춰 세운다. 처음 보는 사람을 향한 웃음이 아니다.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이미 다 알아버린 사람한테만 나오는 웃음.

너는 셔터에 손을 댄다. 차가운 금속이 손바닥에 닿는다. 밀어 올릴 수도, 노크할 수도 있다. 어제의 너라면 그랬을 것이다. '괜찮다고 하지 마요'라고 그의 가면을 정면으로 뚫었던 어제의 너라면.

그런데 손이 움직이지 않는다.

어제 그가 너에게 처음 보여준 것 — 진료대를 붙잡고 떨던 손, '모르게 하는 게 내 일이라고 생각했어요'라던 낮은 목소리, 그 말을 내뱉고 자기도 낯설어하던 얼굴. 너는 그걸 너만 본 줄 알았다. 너만 거기까지 들어간 줄 알았다.

저 안의 목소리는, 그걸 이미 다 아는 목소리다.

너는 손을 뗀다. 손바닥에 셔터의 한기가 그대로 박혀 있다.

조금만. 딱 한 번만 보고 가자.

너는 스스로에게 그렇게 변명하며 셔터 옆, 통유리창 쪽으로 한 걸음 옮긴다. 블라인드가 다 내려오지 않은 그 좁은 틈으로, 처치실 안이 손바닥만 하게 들여다보인다.

민석이 거기 있다.

그는 둥근 의자에 앉아 있고, 한 손엔 주스 팩 같은 게 들려 있다. 다른 손이 — 떨리고 있다. 어제 진료대를 붙잡고 숨기던 그 손이, 지금은 아무것도 붙잡지 않은 채 무릎 위에 그냥 놓여 떨린다.

숨기지 않고.

너는 그 장면 앞에서 숨을 멈춘다.

어제 그는 일 초 만에 가면을 복구했다. 손이 떨리는 걸 너에게 들킨 순간, 그는 곧장 미소를 만들어 붙이고 '오늘은 고양이들을 더 많이 돌봐줬어요' 같은 말로 화제를 돌리려 했다. 너는 그 일 초의 복구 속도가 무서웠다. 얼마나 오래 혼자 연습했길래 저렇게 빠를까, 싶어서.

그런데 지금 그는 그 일 초를 쓰지 않는다.

떨리는 손을 그냥 둔다. 약해진 얼굴을 그냥 둔다. 화면 보호기처럼 늘 떠 있던 그 다정한 미소가, 지금 그의 얼굴엔 없다. 피곤이 그대로 내려앉은 맨 얼굴. 끼니를 거른 사람의 핏기 없는 입술. 그 무방비한 옆얼굴을, 너는 어제도 보지 못했다.

여자가 그 옆에 쪼그려 앉는다. 등을 보이고 있어서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짧은 머리, 편한 카디건. 손을 뻗어 민석의 손목을 잡더니, 떨림이 잦아드는지 가만히 확인한다. 의사가 환자한테 하는 동작 같기도 하고, 그냥 너무 익숙해서 손이 먼저 가는 사람의 동작 같기도 하다.

"숫자 떨어지면 말을 하라니까. 또 혼자 버텼지."

"……버틴 거 아니야."

민석의 목소리. 너에게 늘 쓰던 그 끝이 살짝 올라가는 다정한 말투가 아니다. 변명하다 들킨 아이처럼, 끝이 흐려지는 목소리.

"환자 있을 땐 그럴 수밖에 없어."

"환자 핑계 대지 마. 어제도 그랬다며. 누구 왔었다며, 옆 건물."

너는 그 자리에서 굳는다.

옆 건물. 너다. 그가 저 사람한테 너 이야기를 했다.

심장이 어떻게 뛰는지 너는 알아챌 새도 없다. 그보다 먼저, 손끝이 차갑게 식는다. 주머니 속 초콜릿을 쥔 손가락이 저릿하다. 머리는 아직 아무 결론도 못 냈는데, 몸이 먼저 한 발 물러선다.

민석이 뭐라고 대답하는지는 들리지 않는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작게 웃는다 — 너에게 보여주던 그 만들어진 웃음이 아니라, 어딘가 멋쩍고 풀어진, 진짜 웃음. 여자가 그의 어깨를 툭 친다. 민석은 그걸 피하지 않는다.

저 거리.

너는 그 거리를 본다. 어제 너는 그와 한 걸음을 좁혔다. 우산을 핑계로, 초콜릿을 핑계로, 한 걸음. 그 한 걸음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너는 안다. 그의 가면을 뚫는 데 며칠이 걸렸는지, 매일 퇴근길마다 그 미소 뒤를 궁금해하느라 얼마나 오래 서성였는지.

저 사람은 그 한 걸음 안에 이미 들어와 있다. 노력 같은 건 보이지도 않는 자리에. 떨리는 손목을 아무렇지 않게 잡고, 끼니를 안 챙겼다고 핀잔을 주고, 그의 병을 너보다 먼저, 너보다 오래 알고 있는 자리에.

너만 뚫었다고 믿었던 그 방어를, 저 사람은 진작에 통과해 있었다.

너는 블라인드 틈에서 눈을 뗀다.

주머니 속 초콜릿이 손안에서 미지근해져 있다. 어제 그의 손에 쥐여주려고 체온으로 데운 그 한 조각. 이제는 줄 데가 없어진 한 조각.

너는 소리 나지 않게 돌아선다. 셔터에서, 통유리창에서, 노란 불빛에서 멀어진다. 골목 끝까지 가서야 너는 한 번 뒤를 돌아본다. 병원은 여전히 반쯤 셔터가 내려간 채, 안쪽만 따뜻하게 밝다.

그 따뜻함 안에 네 자리는 없었다.

집에 와서 너는 불도 켜지 않고 한참 현관에 서 있는다.

별일 아니야. 그렇게 생각하려고 한다. 동료일 수도 있고, 누나일 수도 있고, 오래된 친구일 수도 있다. 수의사한테 의학적인 잔소리를 하는 사람이라면 같은 업계 사람일 가능성이 제일 높지 않나. 손목을 잡은 것도 그냥 혈당 확인이었을 거고.

그렇게 정리해놓고도, 너는 그 여자의 웃음소리를 자꾸 되감는다. '천천히 먹어, 누가 뺏어 가.' 그 문장의 마지막 음이 어떻게 떨어졌는지, 너는 이미 외워버렸다. '별일 아니야'를 몇 번을 되뇌어도, 그 음 하나가 매번 그 문장을 도로 무너뜨린다.

외우고 싶지 않은 걸 외워버린 사람만이 안다. 그게 별일이라는 걸.

다음 날 퇴근길.

너는 일부러 평소보다 늦게 건물을 나선다. 마주치지 않으려고. 그런데 마주치지 않으려고 시간까지 계산하는 너 자신이 우스워서, 결국 평소 그 시간에 그 길로 걷는다.

민석은 병원 앞에서 화분에 물을 주고 있다. 너를 보자마자 그의 얼굴에 그 미소가 켜진다. 어제 본 무방비한 맨 얼굴이 아니라, 너에게 늘 보여주던 잘 닦인 미소.

"어, 퇴근해요?"

"……네."

"어제 안 왔네요. 기다렸는데."

가볍게. 정말 아무렇지 않게. 그는 물뿌리개를 내려놓으며 그렇게 말한다. 기다렸는데, 라는 말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너는 잠깐 숨을 멈춘다.

기다렸다고? 어제 그 안에서 저 사람이랑 웃으면서?

"……일이 좀 있어서요."

목소리가 헛돈다. 너는 그걸 들킬까 봐 시선을 화분 쪽으로 내린다. 어제 본 것들이 입 안에서 굴러다닌다. 떨리던 손, 잡힌 손목, '옆 건물 누구 왔었다며.' 그게 다 목구멍까지 차오르는데, 한 마디도 나오지 않는다.

물어보면 된다. '어제 병원에 누구 있었어요?' 그 한 문장이면 된다. 그런데 그걸 물으면, 어제 너가 셔터 앞까지 갔다가 도망친 게 들통난다. 통유리창 틈으로 들여다본 것도. 그가 너 모르는 자리에서 약한 얼굴을 내보이는 걸 훔쳐본 것도.

너는 그걸 들키고 싶지 않다. 그래서 입을 다문다.

"안색이 안 좋은데." 민석이 너를 빤히 본다. 그 시선이 어제처럼 무방비하진 않지만, 분명히 너를 살핀다. 그는 늘 그랬다. 너의 상태를 너보다 먼저 알아챈다. "오늘 좀 추워졌죠. 안에 따뜻한 거 있는데, 핫초코 한 잔 타다 줄까요. 금방이에요."

그가 벌써 몸을 돌리려 한다. 늘 그렇듯. 묻기도 전에 내미는 손. 누가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먼저 데워다 주는 온기.

"아니요."

너는 그 말을 너무 빨리, 너무 단호하게 뱉는다. 민석의 발이 멈춘다.

"……괜찮아요. 안 마실래요."

침묵이 두 사람 사이에 짧게 떨어진다. 너는 네가 방금 한 말의 온도를 뒤늦게 깨닫는다. 늘 받기만 하던 그의 호의를, 처음으로 돌려세웠다.

민석의 얼굴에 뭔가 스친다. 아주 잠깐. 미소가 흔들리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단단해진다. 약함을 들킨 자리에서 더 완벽하게 굴려는 사람의 얼굴. 어제 그 일 초의 복구를 너는 또 본다.

"그래요, 그럼." 그는 더 권하지 않는다. 다정하게 물러난다. 너무 깔끔하게 물러나서, 그게 더 아프다. "감기 조심하고. 들어가요."

그는 다시 물뿌리개를 든다. 화분 쪽으로 몸을 돌린다. 그 등이 평소와 똑같이 다정한데, 너는 그 등이 어제 그 처치실에서 여자에게 보이던 풀어진 등과 다르다는 걸 안다. 너에게 그는 끝까지 괜찮은 척한다. 저 사람에게는 안 그러면서.

너는 돌아선다. 핫초코도, 더 묻는 말도 없이.

걸으면서 너는 두 손을 코트 주머니에 깊이 찌른다. 손끝이 어제부터 계속 차갑다. 잘했어, 적당히 거리 두는 게 맞아 — 그렇게 되뇌는데도, 방금 그가 '핫초코 타다 줄까요' 하던 목소리가 자꾸 귓가에서 다시 켜진다. 그 다정함이 가짜였다면 이렇게까지 또렷할 리가 없는데. 가짜라고 우길수록 그 목소리는 더 선명해진다. 그래서 더 화가 난다. 누구한테 화가 나는지도 모르겠는 채로.

집에 돌아와 너는 코트도 벗지 않고 침대에 걸터앉는다.

생각을 정리하자. 너는 그렇게 마음먹는다.

나는 옆 건물 사람이다. 그게 전부다. 매일 퇴근길에 마주치는, 그냥 옆 건물에서 일하는 사람. 우산을 한 번 빌려준 적 있고, 초콜릿을 한 번 건넨 적 있는 사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어제 '손 줘봐요'라고 한 건, 그래, 그건 좀 주제넘었다. 그는 아파 보였고 나는 도와주고 싶었을 뿐인데, 그걸 무슨 특별한 순간처럼 여긴 건 내 착각이었다. 그는 저렇게 자기를 챙겨주는 사람이 이미 있는 사람이다. 내가 끼어들 자리가 아니었다.

받는 자리에 그를 앉히려 한 것도, 받는 자리에 내가 서려 한 것도, 다 주제넘었다.

너는 그렇게 너 자신을 설득한다. 한 줄 한 줄, 야무지게. 그런데 그 문장들을 다 늘어놓고 나니, 이상하게 마음이 정리되는 게 아니라 더 시리다. 정리가 되는 말이라면 이렇게 아프지 않아야 하는데.

너는 너의 합리화가 사실은 무엇을 가리고 있는지 어렴풋이 안다. '주제넘었다'는 말 밑에 깔린 진짜 문장 — 나도 그 자리에 있고 싶었다. 저 사람처럼, 그가 떨리는 손을 숨기지 않아도 되는 그 한 사람이고 싶었다. 그 욕심을 인정하는 게 무서워서 '주제넘었다'로 덮는 거라는 걸.

너는 침대에 그대로 눕는다. 천장을 본다. 어제 통유리창 틈으로 본 그의 옆얼굴이 천장에 겹친다. 떨리는 손을 그냥 두던 그 무방비한 얼굴. 너는 그걸 지우려고 눈을 감는다. 감으니까 더 또렷해진다.

며칠이 그렇게 지난다.

너는 퇴근길에 병원 쪽을 일부러 보지 않으려 한다. 그러면서도 곁눈으로 다 본다. 민석이 있는지, 그 여자가 또 왔는지. 한 번은 병원 앞에 처음 보는 차가 서 있는 걸 봤고, 한 번은 셔터가 일찍 내려간 걸 봤다. 그때마다 너는 멋대로 이야기를 지어낸다. 둘이 같이 저녁을 먹으러 갔겠지. 둘이…….

그러다 한 번은, 너는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골목 끝 가로등 아래, 너는 일부러 걸음을 늦춘다. 핑계는 신발 끈이다. 끈을 고쳐 매는 척하면서, 너는 병원 쪽을 똑바로 본다. 며칠 동안 곁눈으로만 훔쳐보던 걸, 처음으로 정면으로.

그 여자가 온다.

골목 안쪽에 차를 대고, 익숙하게 내려서, 트렁크에서 비닐봉지 하나를 꺼낸다. 그 안에서 약통 같은 게 부딪치는 소리가 난다. 혈당 시트지일까, 영양제일까. 너는 신발 끈을 천천히 더 천천히 매면서 그걸 다 본다.

그리고 너는 본다. 그 여자가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는 걸.

자기 열쇠다.

노크하지 않는다. 부르지 않는다. 반쯤 내려간 셔터를 자기 손으로 밀어 올리고, 한 번 들어가 본 사람의 발이 아니라 매일 드나든 사람의 발로, 안으로 사라진다. 불이 켜진다. 너는 끈을 다 맸는데도 일어서지 못한다.

자기 열쇠가 있는 사람.

너는 그 한 조각을 손에 쥔 채 천천히 일어선다. 가족이면, 그래, 열쇠 하나쯤 줄 수도 있다. 누나거나, 사촌이거나. 그렇게 생각하면 어제 그 손목 잡던 것도, 그 익숙한 웃음도 다 제자리를 찾는다. 너는 그 설명에 기대고 싶어진다.

그런데 너의 눈은 이미 한 칸 더 본 다음이다. 가족이 매일, 자기 열쇠로, 끼니까지 들고 와서 그의 떨림을 손목 잡아 재는 자리. 그 자리는 그냥 가족이 차지하는 자리가 아니다. 너는 그걸 며칠 전 통유리창 앞에서 이미 알아버렸다. 그가 저 사람 앞에서만 손을 숨기지 않는다는 걸.

가족이라는 말로 겨우 덮으려던 자리에, 더 진한 얼룩이 번진다. 옛날에 무슨 사이였을까. 전 연인이라면? 헤어진 사람이 아직도 자기 열쇠를 가지고 매일 그의 끼니를 챙긴다면, 그건 그냥 가족보다 더 가까운 거 아닌가.

진실 대신, 너는 직접 본 그 열쇠 하나를 의심으로 키우며 골목을 나선다.

그날 밤, 너는 가방을 정리하다 그 초콜릿을 꺼낸다.

며칠 전 그의 손에 쥐여주려고 데웠던 한 조각. 포장이 손때로 살짝 닳았다. 줄 데가 없어진, 의미를 잃은 한 조각.

너는 그걸 들고 쓰레기통 앞까지 간다. 버리면 되는 거다. 이 미련도, 주제넘은 욕심도, 같이.

손을 들어 통 위에 초콜릿을 가져간다.

그런데 손가락이 펴지지 않는다.

이걸 버리면 어제 셔터 앞까지 갔던 너도, '손 줘봐요'라던 너도, 매일 그 미소 뒤를 궁금해하던 너도 다 같이 버려지는 것 같아서. 너는 한참을 그렇게 통 앞에 서 있다가, 결국 초콜릿을 다시 가방에 넣는다.

버리지도 못하고, 주지도 못하고.

너는 그 어정쩡한 자리에 서 있다. 옆 건물 사람도 아니고, 그 한 사람도 아닌, 그 사이 어디쯤에.

늦은 밤이었다.

너는 야근 때문에 평소보다 한참 늦게 건물을 나선다. 골목이 텅 비어 있다. 그런데 병원에 불이 켜져 있다. 진료실 불까지, 환하게.

너는 멈춰 선다. 지나가야 한다. 그냥 지나가면 된다. 그런데 발이 그 불빛 앞에서 느려진다.

문이 열린다.

"……왔어요?"

민석이 서 있다. 흰 가운을 걸친 채, 문틀에 한 손을 짚고. 너를 발견한 그의 얼굴이, 평소와 다르다. 늘 너를 보면 켜지던 그 미소가 오늘은 한 박자 늦다. 대신 그는 너를 빤히 본다. 며칠째 너의 무언가가 달라졌다는 걸, 그는 이미 알고 있다는 눈으로.

"요새……." 그가 말을 고른다. 가운 자락을 한 번 만지고. "요새 인사도 잘 안 하고 가던데."

너는 대답하지 못한다.

"왜 그래요."

그가 먼저 묻는다.

너는 그 말에 숨이 막힌다. 늘 너가 그를 뚫는 쪽이었다. '괜찮다고 하지 마요'라고, 그의 가면을 깨는 쪽. 그런데 오늘은 그가 먼저 다가온다. 너의 굳은 얼굴을, 며칠째 헛돌던 너의 말을, 그가 알아챘다. 그도 너를 보고 있었다. 매일 퇴근길에 너가 그를 살핀 만큼, 그도.

그 사실 하나가, 며칠간 시렸던 너의 가슴 한복판을 뜨겁게 누른다.

문틀을 짚은 그의 손이 보인다. 오늘은 떨리지 않는다. 그래서 너는 더 묻고 싶어진다. 그 손이 떨릴 때 옆에 있던 사람이 누구인지.

말하지 말자고 며칠을 다짐했는데. 그 다짐이, 그가 '왜 그래요'라고 먼저 다가온 순간 무너진다.

"……어제 거기." 너의 목소리가 떨린다. 며칠 만에 처음으로, 너는 본 것을 입 밖에 낸다. "아니, 며칠 전에. 밤에. 병원에 누구 있었어요."

민석의 얼굴이 멈춘다.

그건 가면이 아니다. 일 초 만에 복구되는 그 미소가 아니라, 진짜 당황. 들킬 거라 생각 못 한 사람의 얼굴. 그의 입술이 살짝 벌어지고, 무언가 말하려고 숨을 들이쉰다.

"그건……."

그 순간.

"민석아!"

병원 안쪽에서 그 목소리가 그를 부른다. 며칠 전 셔터 틈으로 들었던, 너무 익숙하고 너무 편한 그 목소리. "이거 어디다 둬? 너 또 어디 갔어."

민석이 안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너에게서, 잠깐.

그 잠깐이면 충분하다.

너는 그가 다시 너를 보기 전에, 그 입에서 답이 나오기 전에, 돌아선다. 주머니 속 초콜릿을 손가락이 꽉 쥔다.

"저기, 잠깐만." 민석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너를 붙잡으려 한다. "이봐요, 잠깐만요."

너는 멈추지 않는다. 멈추면 그 답을 듣게 될 것 같아서. 듣고 싶으면서, 듣는 게 무서워서.

골목을 빠르게 걸어 나오는 너의 등 뒤로, 병원 불빛이 길게 늘어진다. 그 안에 그가 있고, 그 목소리가 있고, 너만 모르는 무언가가 있다.

그가 너에게도 끝까지 괜찮은 척하는, 또 하나의 '괜찮은 척'이.

저 사람은 누구일까. 그리고 그는 — 왜, 너에게만은, 끝까지 떨리는 손을 숨기는 걸까.

골목 중간쯤에서, 너는 그 소리를 듣는다.

발소리다. 빠르고, 정돈되지 않은. 늘 정확한 박자로 화분에 물을 주던 사람의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흐트러진 발소리. 그 소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너는 멈추지 않으려 한다. 더 빨리 걷는다. 그런데 발소리가 너보다 빠르다.

"잠깐만."

손목이 잡힌다.

너는 그 자리에 박힌 듯 선다. 손목을 감싼 그 손이 — 떨리지 않는다. 며칠 전 처치실에서 무릎 위에 놓여 떨리던 그 손이, 지금은 너의 손목을 단단히 붙들고 있다. 잡은 쪽이 오히려 숨이 가쁘다. 너의 등 뒤에서, 그의 숨소리가 고르지 못하게 끊긴다.

"……좀, 서봐요. 부탁이니까."

너는 천천히 돌아선다.

민석이 가운 차림 그대로 거기 서 있다. 단추를 채울 새도 없었는지 자락이 벌어진 채로,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그가 병원 문턱을 넘어 여기까지 왔다는 게, 너는 뒤늦게 실감난다.

그는 한 번도 이 선을 넘은 적이 없었다.

너는 그걸 며칠 동안 곱씹어 알았다. 그는 늘 병원 안쪽에 서서 너에게 무언가를 내밀기만 했다. 우산을, 핫초코를, 미소를. 문턱 안에서. 환자를 기다리는 사람이 늘 그 자리를 지키듯, 그는 한 발도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너에게 다가오는 건 언제나 그의 손이지, 그의 발이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그는 밖에 있다. 불 켜진 병원을, 그 안의 목소리를, 등 뒤에 다 두고. 어두운 골목 한가운데, 너의 손목을 잡은 채로.

"왜 자꾸 도망가요."

그가 묻는다. 숨을 고르려고 한 번 끊었다가, 다시.

"내가 뭐 잘못했으면 말을 해요. 며칠째 인사도 안 하고, 핫초코도 싫다 하고, 오늘은 아예 나 못 본 척 지나가려 하고. 나는 그게……."

그의 말이 거기서 한 번 멈춘다. 잘 닦인 문장을 늘 준비해두는 사람이, 처음으로 다음 말을 찾지 못한다.

"……그게 신경 쓰여서, 며칠 잠도 잘 못 잤어요."

너는 그 말을 듣고 숨을 멈춘다.

신경 쓰여서. 잠도 못 잤다고.

너는 그 문장을 머릿속에서 한 번 더 굴린다. 늘 너의 안색을 너보다 먼저 알아채던 사람. 오늘 추워졌죠, 안색이 안 좋은데, 하던 사람. 너는 그게 그저 그의 다정한 직업병 같은 거라고 생각했다. 누구에게나 그렇게 하는 사람이라고. 옆 건물 사람한테도, 길고양이한테도, 화분한테도.

그런데 지금 그가 하는 말은 다르다. '너'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며칠째 인사를 안 하고 지나간 너 하나가, 그의 밤잠을 가져갔다.

너가 매일 퇴근길에 그 미소 뒤를 궁금해하며 서성이는 동안, 그도 너를 보고 있었다. 너가 시간을 계산해 늦게 나온 날도, 곁눈으로 병원을 살핀 날도, 핫초코를 단호하게 거절한 날도 — 그가 다 세고 있었다. 그 사실 하나가 며칠간 시리기만 하던 가슴 한복판을 뜨겁게 누른다. 너는 그 온기가 무서워서, 일부러 시선을 그의 벌어진 가운 자락에 둔다.

"……손목."

너는 겨우 그 말을 꺼낸다. 그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한다.

"손목, 안 떨려요. 지금은."

그의 얼굴이 굳는다. 너가 무얼 말하는지, 그가 한 박자 늦게 알아챈다. 그의 손이 너의 손목에서 천천히 풀린다. 잡았던 자리에 그의 체온이 미지근하게 남는다.

"……봤구나."

낮은 목소리. 너에게 늘 쓰던, 끝이 살짝 올라가는 다정한 말투가 아니다. 며칠 전 처치실에서 여자에게 변명하던, 끝이 흐려지던 그 목소리. 그가 처음으로 너 앞에서 그 목소리를 쓴다.

"언제."

"……며칠 전. 밤에." 너는 거짓말을 못 한다. "셔터 앞까지 갔다가. 안 들어가고. 통유리창으로."

말해놓고 너는 부끄러움에 고개를 든다. 변명하려고 입을 떼는데, 그게 더 우스워질 것 같아 다시 다문다.

민석은 화내지 않는다. 오히려 어딘가 풀린 얼굴이 된다. 며칠 전 통유리창 너머에서 봤던, 가면이 벗겨진 그 맨 얼굴이 지금 골목 가로등 아래에 다시 떠오른다. 피곤이 그대로 내려앉은. 끼니를 거른 사람의 핏기 없는 입술.

"그래서였구나." 그가 짧게 웃는다. 멋쩍게. "핫초코 싫다 한 거."

"......"

"내가 그날, 너 왔다 갔다는 거 모르고." 그가 손으로 제 얼굴을 한 번 쓸어내린다. "다음 날 너 안 보여서, 일 있나 보다 했는데. 그게……."

그 사람 누구냐고. 너는 그 말을 며칠 동안 삼켰다. 묻고 싶으면서, 듣는 게 무서워서. 가족일까, 옛날에 무슨 사이였을까, 자기 열쇠로 매일 드나들던 그 뒷모습이 입 안에서 굴러다닌다.

그런데 지금은, 그가 먼저 여기 와 있다. 문턱을 넘어, 떨리지 않는 손으로 너를 붙잡으러. 그가 너에게만 끝까지 숨기던 떨리는 손을, 오늘은 그가 먼저 멈춰서 너를 잡았다. 그러니 물어도 될 것 같다. 오늘은.

"어제 그 사람." 너의 목소리가 떨린다. 며칠 만에, 너는 끝내 그 문장을 입 밖에 낸다. "아니, 그날. 손목 잡아주던 그 사람. 누구예요."

민석이 너를 본다.

이번엔 가면이 아니다. 일 초 만에 복구되는 미소가 아니라, 무언가를 들킨 사람이 그걸 더는 숨기지 않기로 한 얼굴. 그가 천천히 숨을 들이쉰다. 어렵게.

"그 사람은……." 그가 입술을 뗀다. 말을 고른다. 잘 닦인 문장이 아니라, 처음으로 진짜를 꺼내려는 사람의 더듬거림으로. "그 사람은, 나한테……."

그 순간.

"민석아!"

병원 문 쪽에서 그 목소리가 그를 부른다. 골목 끝까지 너무 쉽게 흘러나오는, 닳도록 익숙한 그 음높이. "어디 갔어, 너. 약 시간 됐다고! 혈당 또 떨어지기 전에 빨리 들어와."

민석이 안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너에게서, 잠깐.

너는 그 잠깐을 본다.

그가 그 목소리에 반응하는 속도를. 약 시간, 혈당, 그 단어들 앞에서 그의 어깨가 자기도 모르게 굳는 그 반사를. 저 사람은 그의 몸이 언제 무너지는지를 안다. 그의 끼니를, 그의 숫자를, 그의 떨림을. 너보다 먼저, 너보다 오래.

그가 다시 너를 보려고 고개를 돌린다. 무언가 말하려고. 아까 그 문장의 나머지를 잇기 위해.

그 잠깐이면 충분하다.

너는 그가 답을 마저 꺼내기 전에, 그 입에서 '그 사람은 나한테'의 뒷말이 나오기 전에, 한 발 물러선다. 주머니 속 초콜릿을 손가락이 꽉 쥔다. 며칠째 데웠다 식기를 반복한, 줄 데 없는 한 조각. 오늘도 결국 줄 데가 없다.

"가봐요." 너는 말한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게, 안간힘을 쓰며. "부르잖아요. 약 시간이라고."

"잠깐만." 민석의 손이 다시 너를 향해 올라온다. "그게 아니라, 들어봐요. 그 사람은—"

"가봐요."

너는 그 말을 한 번 더, 더 단단하게 뱉는다. 그러지 않으면 그 자리에 주저앉아 다 듣게 될 것 같아서. 듣고 싶어서, 듣는 게 무서워서.

그런데 이번엔, 그게 도망만은 아니다. 며칠 전 '안 마실래요'라고 그의 핫초코를 처음 돌려세웠을 때처럼, 너는 그가 내미는 걸 한 번 더 너의 손으로 밀어낸다. 그의 답을, 그가 고른 시간에, 그를 부르는 목소리 앞에서 받고 싶지 않다. 받을 거라면 너가 고른 자리에서 받겠다. 늘 받기만 하던 네가, 이번에도 받는 자리를 스스로 정한다. 그 작은 단단함 하나가, 며칠째 휘청이던 너를 처음으로 네 발로 서게 한다.

너는 돌아선다.

이번엔 그의 발소리가 따라오지 않는다. 따라올 수 없다.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약 시간이, 혈당이, 그를 다시 그 불 켜진 안쪽으로 가져간다. 너는 그가 어떤 얼굴로 거기 서 있는지 보지 않으려고 앞만 보고 걷는다.

골목을 빠져나오며 너는 깨닫는다. 오늘 그는 처음으로 문턱을 넘어 너에게 왔다. 너를 붙잡으러, 떨리지 않는 손으로. 너의 며칠을, 너의 잠 못 든 밤을, 그가 다 보고 있었다는 걸 알려주러.

그건 분명히, 며칠간 시리기만 했던 너에게 처음으로 쥐여진 따뜻한 한 조각이다. 그도 너를 본다. 너가 그를 본 만큼. 그 한 모금이 가슴에 번지는 걸, 너는 걸으면서 천천히 느낀다.

그리고 오늘, 너는 그 앞에서 도망만 친 게 아니다. 그의 답을 너의 손으로 한 번 밀어냈다. '안 마실래요'라고 했던 그 손으로, 오늘은 '가봐요'라고. 그게 며칠 만에 처음으로, 휩쓸리기만 하던 너에게 디딜 땅 한 뼘을 만들어준다.

그런데 그 한 모금이 번질수록, 듣지 못한 뒷말이 더 크게 자리를 비운다. '그 사람은 나한테—.' 거기서 끊긴 문장이, 가로등을 하나씩 지날 때마다 너의 머릿속에서 다른 끝으로 이어진다. 나한테 가족이에요. 나한테 누나예요. 나한테…… 였던 사람이에요.

너는 어느 것도 고르지 못한 채 집으로 걷는다.

손끝은 더 이상 차갑지 않다. 그가 잡았던 손목에 아직 그의 체온이 미지근하게 남아 있다. 며칠 만에 처음으로, 너의 몸은 따뜻한데 — 머리는 더 추워진다.

그는 왜, 너에게만은, 끝까지 떨리는 손을 숨겼을까. 저 사람 앞에서는 무너져도 되는 약함을, 왜 너 앞에서는 일 초 만에 복구했을까.

저 따뜻한 불빛 안에서 그를 부르는 목소리의 정체보다, 너는 그게 더 무섭다. 그가 너에게도 끝까지 괜찮은 척하는, 또 하나의 '괜찮은 척'이. 어쩌면 그를 부르는 그 목소리와, 그가 너에게 숨기는 그 떨림이, 같은 곳에서 나온 한 가지 이야기일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집 앞에 다다라서야 너는 주머니에서 손을 뺀다. 초콜릿은 또 미지근하게 데워져 있다.

내일은 묻자. 너는 그렇게 다짐한다. 내일은, 그 뒷말을 끝까지 듣자. 가봐요, 라고 돌려세우지 말고.

그런데 내일의 너가 정말 그럴 수 있을지는, 오늘의 너도 아직 모른다.